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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9. 19世 〉25. <부정공>처사휘재익묘갈명(處士諱在益墓碣銘)
1. 문헌 목록 〉19. 19世 〉27. <부정공>평은공휘진팔가장(坪隱公諱鎭八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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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부정공>둔암공휘원묘갈명(遯菴公諱洹墓碣銘)
遯菴公諱洹墓碣銘 趙君泳善以家狀來曰吾王考遯菴公孝友學行有不可朽者而墓無顯刻大懼久而泯也敢丐辭以賁之不佞病廢無文固辭不獲謹按公諱洹字汝會號遯菴玉川趙氏以高麗侍中諱璋爲上祖自其不仍士大夫不絶本朝有諱大成號梅窓處士是生諱怡號蓮潭而諱徑號竹軒 贈敎官考曰宗良號素窩妣善山柳氏文節公希春後鸞樹女曰宗熺號晦窩壽職副護軍咸安趙氏靖節公旅後道勳女其本生父母也公以健陵庚申閏四月十日生天性至孝六歲失恃號泣擗踊有若成人見者嗟異繼母陜川李氏性素剛嚴公惋愉承順無違其志每事服勞有命即行李氏常曰此兒眞孝子也八歲受小學於從叔父筍塢公讀未卒業而人不行此道理不可爲人事柳夫人人如所生柳氏撫育之亦如己胞焉公性質仁厚端重罕言語小喜怒自在齠齔人莫窺其涯際家素貧窶雖至屢空竭力養親甘旨無闕善於兄弟和氣可掬奉先而致敬盡禮推巳而敦宗睦族待人接物隱惡揚善平居未見疾言遽色安肆怠慢之意沉潜玩索惟在經傳而尤所致意朝夕誦讀者孝經也戊戌丁柳氏憂送死之節一遵禮制哀毀成疾而不進薑桂乙卯遭晦窩公喪號慟幾滅性鄕里一辭稱孝無間然地主朴麟壽薦目曰劬經力行至老彌篤李秉五薦目曰經明行修矜式鄕黨一代公議亦不可誣也 高宗己巳二月三日考終于寢享年七十葬于谷城牛谷面先壠最下負丁之原配廣州李氏象參女右議政忠僖公仁孫後甚有婦德乙丑八月二十二日庚午正月二日其生卒也墓與公合封三男長昌驥號明谷次昌馹號梧村季昌駿號紫谷俱有文行昌驥一男馨燮二女長適金蓮淇以烈旌閭次適崔炳貞昌駿二男泳嘉泳善昌駿一男泳愚二女適朴海斗李敎植餘不盡記泳善師事吾先君子文學行義蔚有聲譽公之餘蔭其將永垂於無窮也銘曰淵源故可惟公篤生孝友詩禮早著令名行修于身德垂于後宜有斯刻永眎不朽 月城 崔永祚 撰 둔암공휘원묘갈명(遯菴公諱洹墓碣銘) 조군(趙君) 영선(泳善)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말하되 우리 조부 둔암공(遯菴公)의 효우(孝友)와 학행(學行)이 가히 영구불멸(永久不滅)할 것이 있는데 묘소에 나타나게 새긴 것이 없으므로 오래되면 민몰(泯沒)될까 한다. 하나 내가 병들고 학문이 부족하므로 굳이 사절 하였으나 듣지 아니함으로 삼가 살피니, 공의 휘는 원(洹)이요, 자는 여회(汝會)며 호는 둔암(遯菴)이고 옥천인 인데 부정공 휘 유(瑜)의 후예로 연담 진사휘 이(蓮潭進士諱恰)의 八세손 이시다. 공의 휘는 종량(宗良)이요 호는 소와(素窩)이며 비(妣)는 선산 유씨(善山柳氏) 문절공(文節公) 희춘의 후예인 란수의 녀(希春後鸞樹女)이고, 종희(宗熺) 호 회와(晦窩) 수직 부호군(壽職副護軍)과 함안 조씨(咸安趙氏) 정절공여의 후예인 도훈의 녀(靖節公旅後道勳女)는 그 본생부모였다. 공이 정조(正祖) 경신(一八○○)년 윤 四월 十일에 출생하여 천성과 효성이 지극하여 六세에 부친을 잃고 부르고 울며 가슴을 두드리고 뛰기를 성인(成人)같이 하니, 보는 자가 차탄하였다. 계모 협천 이씨가 성정이 원래 강엄하나 공이 화열한 안색으로 그 뜻을 어김이 없어 매양 일에 노력하고, 명령대로 즉시 거행하니, 이씨가 항상 말하되 이 애는 참 효자라 하였다. 八세에 소학(小學)을 순오공(筍塢公)에게 배워 다 읽기전에 사람이 이 도리를 행치 아니하면 가히 사람이 되지 못한다 하고 양모 섬김을 생모같이 하니 양모가 기출같이 어루만져 길렀다. 공이 성질이 인후(仁厚)하고 단중(端重)하여 말이 적고 희노(喜怒)를 나타내지 아니하니, 어릴 때부터 사람이 그 도량의 깊이를 엿 볼수 없었다. 집이 본래 가난하여 비록 식량이 자주 떨어졌으나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봉양하며, 좋은 반찬을 궐함이 없고 형제가 우애하니, 화기가 애애 하였으며 선영에 공숙하게 예를 다하고 미루어 종족간에 화목하며,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다하매 과실을 숨기고 착한 일은 찬양하며 평소에 모진 말과 당황한 빛이며, 편안히 방종하고 게으르고 오만한 뜻을 보지 못하였다. 깊이 연구한 것은 오직 경전(經傳)이요, 더욱 뜻을 모아 아침 저녁으로 외우고 읽은 것은 효경(孝經)이었다. 무술(戊戌)년에 양모 상사를 당하여 예제에 따라 슬퍼하고, 몸은 헐어 병을 얻었으나 약을 먹지 아니하고 을묘(乙卯)년에 생부상을 당하여 부르짓고 애통하여 겨우 생명을 이을 정도가 되니 향방(鄕坊)이 지극한 효행이라 일컬으고 성주(城主) 박 인수(朴麟壽) 천목(薦目)에 글을 부지런히 읽어 힘써 행하여 늙도록 더욱 독실하였다고 하였고 이병오(李秉五)천목에 경전에 밝아 몸을 닦고 향당(鄕黨)의 규범이라 하였으니 당세의 공의를 또한 가히 속이지 못하겠도다. 고종(高宗) 기사(一八六九)년 二월 三일에 향년 七十세로 고종(考終)하니 곡성 우곡면 선롱하 부정지원(谷城牛谷面先壠最下負丁之原)에 안장하고 배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상삼녀(象參女)인데 우의정 충희공 인손의 후(右議政忠僖公仁孫后)로 심히 부덕이 있었고 을축(乙丑) 八월 二十二일과 경오(庚午) 정월 二일이 그 생졸이며 묘소는 공과 합봉이었다. 아들은 三남인데 장남 창기(昌驥)는 호가 명곡(明谷)이요 차 창일(昌馹)은 호가 오촌(梧村)이며 계(季) 창준(昌駿)은 호가 자곡(紫谷)인데 함께 문행이 있었고 장방(長房) 一남은 형섭(馨燮)이요 二녀 중 장은 김 연기(金蓮淇)에 출가하여 열행으로 정려하였고 다음은 최 병정(崔炳貞)처며 차방 남은 영가(泳嘉)·영선(泳善)이요 계방 一남은 영우(泳愚)이며 二녀는 박 해두(朴海斗)이 교식(李敎植)처고 나머지는 다 기록치 아니한다. 영선(泳善)이 우리 선군자(先君子)를 스승으로 섬겨 문학과 행의가 성대한 명성이 있으니 공이 남긴 음덕이 장차 다함이 없이 길이 남으리로다. 새겨 가로되 세덕 있는 곡가에 오직 공이 족실하게 태어나(淵源故可惟公篤生) 효도하고 우애하며 시와 예로 일찍 착한 이름을 드높이고(孝友詩禮早著令名) 행의로 몸을 닦고 덕으로 뒤에 남기니(行修于身德垂于後) 마땅이 이 각명을 보존하여 길이 천추에 보이리라(宜有斯刻永眎 不朽) 월성(月城) 최영조(崔永祚)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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